미술칼럼

구토하는 올랭피아의 美(고등어)

curatinglab 2013. 3. 8. 04:46

구토하는 올랭피아의 美, 고등어

 

작가 ‘고등어’의 그림 속 이미지들은 해체, 분리된 여성의 신체들을 빽빽하게 배치시킴으로써 관람자의 시각에 일정한 데미지를 준다. 비천함(Abjection)을 함축한 이미지들이 화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것은 ‘마이클 홀퀴스트(Michael Holquist)'의 표현대로 “그로테스크를 통해 제시되어 왔던 자유와 용기에 관한 담론”을 환기하기 위함일 것이다. 사회구조나 문화구조를 통해 강제,억압되어 왔던 ‘여성성’에 대한 반론에서부터 출발하는 고등어의 작품은, 이 모든 극단적 이미지들을 통해 통념을 강렬하게 비웃고 그 모서리로부터 얻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탐구들로 빼곡하다. 주체로서의 ‘보는 것’이 아닌 ‘보여지는 것’에 시달려온 여성의 강박을 표층으로 드러냄으로 얻는 치유, 다시 말해 그로테스크 담론의 ‘파괴를 통한 생성’의 논리를 적절히 응용한 경우다.

 

 

 

 

 

원래 그로테스크는 동굴의 의미를 갖는 ‘그로테(grotte)’라는 이탈리아어로 부터 유래한다. 이는 '동굴처럼(grotto-esque)' 깊고 어두운 지형적 특성을 여성 신체의 메타포로 규정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루소(Russo)의 식대로, “낮고/ 숨겨지고/ 땅에 관계되며/ 물질적이고/ 내재적이며/ 내장 같은” 동굴의 이미지가 여성의 신체,해부학 특성으로 표현되고, “지상적이고/ 물직적이고/ 고풍적인” 그로테스크가 대지의 여신, 메두사와 같은 고대 여성 이미지와 결부되면서 ‘그로테스크 바디’로 등장하게 된다. 그로테스크 담론은 정상과 표준의 척도를 이야기하는 것, 즉 신체적 기형 그 이상의 반항과 위반을 상징하는 것을 제시한다. 결국 이런 그로테스크 바디는 정치, 사회적 신체로 상징, 치환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등어의 그림 속 신체들이 초현실적으로 절단되고 변형된 것은 이러한 맥락과 태도로 해석되어야 한다.

 

 

‘구토하는 올랭피아’에서, 그로테스크 회화/사진에서 자주 애용되는, 삼키고 토하는 ‘구강적 사디즘(oral sadism)’을 통해 ‘파괴와 재생’의 논리를 피력하는데, 고대 신화에서 차용된 듯한 작법, 이를테면 다리 벌린 여성의 성기 안으로 군중이 쓸려들어가는 것이나, 동물의 젖을 먹는 아이들의 모습들이, 모두 ‘파괴와 재생’의 연장선에 위치하는 것들이다. 반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강요했던 언어와 시각들에 관한 폭력성을 푸른 옷의 남성들을 통해 은밀하게 드러내고 포장하기에 이르지만, 동시에 그런 남성성과 여성성의 분리에 관한 무용함을 피력하는 쪽이 작가의 태도다. 곧, ‘젠더Gender’ 이전에 인간의 사회학적 보편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이다. 작품 속에 여성들은 규범으로부터의 이탈로 상징되고, 신체 범주로 보자면 비정상적이고 변이적이다. 이런 변형된 ‘그로테스크 바디’는 여성성을 남성에 대한 다름으로 규정, 무차별적으로 성별을 강조하는 초기 페미니즘의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했던 장치들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 드러난 부계질서에 대한 위반적인 상징법들은 ‘라깡(Jacquesle Lacan)’의 이론에 의하면 어머니와의 ‘외상적(traumatic)'분리를 통한 상실감을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그로테스크가 여성의 출현만을 인정하거나 남성 신체나 주체를 완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남녀 모두 인간이란 카테고리 안에서 위험과 비천함에 동시에 관계하고, 형성하는 것. 여성간의 차이, 여성 내부의 이질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남성적 그로테스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 모든 양성화의 속성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푸른 옷으로 표현된 남성들의 군상이 오히려 우울하고 어리석고 불완전해 보이는 것도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일 수 있는 모호한 중의성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3개나 달린 유방, 절단되고 남은 한쪽 다리에 신은 붉은 스타킹, 성욕을 감추지 않고 자유롭게 유희하는 해괴한-보편적 시각에서- 모습, 수유와 출산의 여과 없는 표현들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의 보편성에 가까운 존재들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작가가 지속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층위에 포진해 있다고 보면 된다.

 

 

거식증의 경험이 있는 작가는, 보여주기 위한 규격화된 기준으로 인해 고유한 자신의 언어를 훼손하고 주체를 파괴해버리는 역사의 악순환을 개인의 일로만 덮어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랜 사회구조 안에서 빚어진 문제였을 것이고, 오랜 통념이 만들어 놓은 굳어진 사고의 편협성 때문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타인(혹은 남성)의 눈에 즐거울 옷을 사고, 타인의 눈에 멋있을 몸매를 만들면서 정작 소멸되어갔던 자신을 되찾고 확립하는 일은 터부시했던, 나약한 우리의 오류들을 환기하고 바로잡는 일. 작품 속 여자인형들과 찢겨진 여성의 신체들을 통해 우리는 허상이 아닌 실체를 마주하게된다. 이 모든 트라우마와 치유의 과정이 결국 우리 모두에게 긍정적 반동을 이끌어내고 동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로테스크하고 아픈 신체들의 해체를 통해 오히려 더욱 굳건해지는 점에서 말이다.

 

미술작품들에서 빈번하게 짚고 가는 부분은 바로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치유되는 원리’이다. 작가가 강제된 ‘성적(Gender) 트라우마’를 해괴하고 파괴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고백한 것은 앞서 언급되었던, ‘자유와 용기에 관한 담론’을 이끌어내고자 함이다. 고백함과 동시에 용기를 얻고 다시 치유로 이어지는 것, 그것은 결국 규제되어온 여성성 남성성 모두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논리로 귀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Lab DotlineTV 디렉터 / 독립큐레이터, 문예진
(주)샘표식품의 공장미술관인 샘표스페이스 큐레이터 재직 / DotlineTV기획,제작
2009ATU,2010ATU 기획 및 감독(KT&G상상마당,아트하우스모모) / 굿모닝신한증권갤러리 개관전
외 다수의 큐레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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