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칼럼2013. 3. 8. 05:05
원본의 퇴행을 통한 새로운 리얼리티,권아람


 
권아람_공진화 Coevolution_단채널 비디오, HDV_00:02:40_2009


권아람의 미디어아트는 이미지와 시간을 자르고 재배열하는 영상 어법을 사용하는데, 주로 디지털 스캐닝을 통해 대상을 복제, 왜곡시킴으로써 순차적 시간을 비웃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공간과 대상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뿐 아니라, 정형화된 서사를 혼란시키게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이 전위적 화면이 작가의 혹독한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인데, 디지털 테크닉을 구사하는 영역에서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테크놀러지의 영향력 아래 창작에 있어 노동의 위상과 의미가 하락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권아람의 미디어아트에서 수반된 지독하고 지루한 ‘노동’은 유쾌한 반전이다. 작가와 테크니션이 호흡을 맞추는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사례들에서처럼, 예술품의 가치가 기술력 노동력의 의미에서 한 발짝 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권아람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고전적 노동이 하이테크놀러지를 활용하는 지금의 미술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얼굴, 손가락 등의 신체를 엑스레이 사진을 찍듯, 몇 백장의 디지털스캔 작업을 통해야만 작품의 재료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반복 수행을 통해 깨닳음을 얻는 동양적 태도에 닿아있어, 디지털아트의 다른 재미와 시각을 넌지시 제시하고 있다.
한국에서 미디어아트로 분류되는 작품들의 대다수가 무빙이미지, 필름 쪽에 가까운 것은 호주나 일부 유럽의 작품들과 견주어 재미있는 현상이다. 미디어아트는 일반적으로 테크놀러지 혹은 움직임을 통해 공간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이 작품의 의미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 등을 모두 작품의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권아람의 작업은 고전적 비디오 아트와 현재의 미디어아트 경계에서 영리하게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권아람_손가락 꽃 Finger Flowers_단채널 비디오, HDV_00:03:00_2009


 

작품에서 유도하는 ‘혼란’은 스캐너와 신체가 접촉하면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우연한 움직임 혹은 의도된 움직임으로 인해 원본의 첫번째 왜곡을 초래하고, 이 변질된 이미지를 디지털 수작업을 통해 해체 재조합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원본의 의미를 탈락시킨다. 작가는 이것을 '리얼리티'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으로 간주하고, 원본의 퇴행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두고 있다. 
사진 작업에서 다루어지듯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 것이 스캔작업의 묘미다. 그런 과정을 지나면서 구축된 이 동양적, 전위적 화면에서 ‘리얼리티’를 의심하는 태도를 발견하는 것은 예정된 인과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은 처음부터 잘못 입력된 ‘이미지’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짜의 현실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작가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수백번의 스캔작업을 통해 원본의 무의미를 각성하게 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닷라인TV와 함께 문화잡지 VoiLa에도 게재되었습니다.



 현) DotlineTV 디렉터 / 독립큐레이터, 문예진

(주)샘표식품(샘표스페이스) 큐레이터 / DotlineTV기획,제작
2009ATU,2010ATU 기획 및 감독(KT&G상상마당,아트하우스모모) / 굿모닝신한증권갤러리 개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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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칼럼2013. 3. 8. 05:03

가상 서바이벌 속 블랙코미디, 김민


무한도전, 1박2일, 아메리칸아이돌 류의 ‘리얼쇼’들이 TV매체를 장악하고 있는 지금, 버추얼라이프(virtual life)를 설계하는 한 아티스트가 있다. 대중문화의 핵심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간 ‘김민’은 미국TV의 리얼리티쇼를 차용하여, "아티스트 웨이(ARTIST`S WAY)"라는 가상의 방송을 작업의 주된 장치로 활용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보아왔던 구성이나 촬영방식, 화법의 역동성 등을 고스란히 작업의 정서적 마티에르(matière)로 응용하고 있는 것인데, 물론, 이건 김민이라는 작가의 창작적 바운더리 안, 그러니까 작가의 ‘개인방송국(http://www.mintv.co.kr)’ 안에서만 존재하는 방송물인 셈이다.


웹 기반 세대가 가질 수 있는 창작의 다이나믹함과 웹아트(web art)에 내포된 유용한 대중코드를 적극 수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김민의 작업은, 모든 작가들이 그렇듯, 밥벌이를 하며 창작해야하는 ‘생존’의 문제를 직접적인 작업의 소재로 내세워, 가장 설득력있고 흡입력이 강한 시각적 테크닉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매주 서바이벌 게임을 통해 최종 승자에게 주어지는 ‘국립미술관 올해의 신진작가’와 같은 명예와 상금은, 현재 젊은 아티스트들이 겪고 있는 내적 갈등과 욕망을 명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미술계에서 일어나는 블랙코미디를 다루는 작법이나 내러티브를 확장시키는 노련함을 볼 때, 분명, ‘영화,TV,오락’ 등, 전 분야에 걸친 이데올로기나 기술적 욕망, 소통의 대립항에 관한 정교한 탐구가 수반된걸로 보인다. 이것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작품의 완성도와 작가의 태도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이트 큐브의 갤러리에서 인터넷으로 예술 공간을 확장시킨 웹아트가, 예술 매체와 제작방식, 유통, 향유 등에 관한 전통적 규칙을 재정의 했던 것처럼, 김민의 작업 또한 부팅과 버퍼링 조회수에 익숙한 디지털미디어의 속성을 효과적으로 대입하고 있다. ‘나탈리 부크친(Natalie Bookchin)’이 게임을 예술의 영역으로 유인하여 관습적 미학에 대한 결핍을 충족시켰다면, 김민은 TV매체와 인터넷방송국의 온,오프라인 양자를 절충하고 침투시켜서 ‘자본과 소통’에 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미술도 TV처럼, 즐겨 소비하는 매체로 등극할 것인가?’, ‘이것은 진보인가 퇴행인가’와 같은 다양한 문제와 시각을 제시하는 이런 작업 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떠안기고야 마는 아직은 뜨거운 ‘문제작’이다. 김민은 그래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작가이다. 만약 어떤 방식으로든 대안을 만들어낸다면, 파격적인 ‘소통구조’가 창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무엇이 전달되느냐인데, 이것이 작가가 풀어가야할 주요 과제다.

2008-2009년 보일라 연재된 글을 수정



 현) Lab DotlineTV 디렉터 / 독립큐레이터, 문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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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칼럼2013. 3. 8. 05:00

폭로를 통한 치유와 해체를 통한 복구, 오석근 

트라우마(Trauma)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고, 심리학, 정신병리학과 같은 영역들의 탐구가 공격적으로 가시화되는 것은 그만큼 공동체 속의 ‘객체’가 화두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살자의 급증 현상이나 기괴한 비현실성과 절망, 도착증세의 만연, 싸이코패스의 급증, 이런 이상 징후들은 개인과 맞물린 사회적 치유와 긴밀하게 엮인 문제이기에, 안팎과 이기(理氣) 등의 전방위적인 접근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오석근의 사진작업은 ‘고백’인 동시에 ‘폭로’이고, ‘상처’인 동시에 ‘치유’이다. 유년시절의 충격적 기억을 복구하여 현재의 공간에 대치시킨다는 점에서 고백이지만, 각종 드라마틱한 장치를 설치하는 이미지 기술법들, 이를테면 초등학교 교과서 안에 살던 ‘철수와 영희’를 소환하여 ‘탈선’으로 주입되었던 각종 시츄에이션을 여과없이 표면화시킨다는 점에서는 ‘폭로’라는 것이다. 그건 우리 유년의 관습적 교육과 그 사각지대를 고발하고, 고백과 폭로를 통한 치유의 병리학을 포괄적으로 다룬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오석근은 교과서(Text book)시리즈를 통해 80,90년대를 지나온 유년의 단상-탈선으로 주입되었던-을 재구성하고, 교과서가 가졌던 강제와 관습을 전복하는 번외편을 만든다. 그가 재구성한 이 교과서 속 우리의 ‘철수와 영희’는 해맑은 얼굴의 인형탈을 쓰고 부탄가스를 마시며 첫경험을 하거나, 영희의 속옷에 손을 집어넣고 포르노그래피를 보거나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다. 그리고 그들의 행각이 진행되는 물리적 배경은 한국의 고질적 문제들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어느 음습한 장소다. 이 극단적 시각의 배치는 우리 성장기 전면을 부정하도록 알고리즘을 형성하고 공동체(사회)시스템에 대한 도덕적 기대를 뒤흔드는 기폭제로 작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 국가와 개인간의 트라우마가 어떤 메커니즘(mechanism)으로 작동하게 되는지를 섬세하게 상술해내기 위한 최적의 장치(dispositif)라는 의미다. 개인과 국가(사회)의 관계설정에 대한 작가의 관점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분별한 개발이 난무한 도시공간들, 비정상적 압축식 경제성장-고도의 성장이라 상찬되곤 하는-이 낳은 ‘사태’의 현장들이 그 출발선이다. 개인과 국가, 그 성장사의 모순과 상쇄를 단편화함으로써 개인의 유년기를 되짚고 동시에 그 기억을 존재하게 했던 보이지 않는 사회구조적 작용들에 대해 환기하게 하는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굳이, 한국이라는 특수성을 전제하지 않아도, 유년기의 기억들이 가진 보편성들도 있다. 금지된 것에 관한 무한한 탐구심, 낯선 곳에서 부모(보호자)의 손을 놓칠 때의 위기감, 옷장 안에 들어가 편안함을 느꼈던 하루, 어른들이라는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 찾기 등, 철저한 유년의 보편성을 말초적으로 건드려주는 한 축도 분명 유효하다. 더불어 공동체인 동시에 개인이면서 과거인 동시에 현재와 미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철수와 영희는 나와 집단, 그 모든 의식 속의 기표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배웠던 교과서 속의 세상은 요즘말로 ‘토 나오게’ 밝고 아름답다. 그렇다면 이 번외편의 교과서가 각성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햇빛이 만들어주는 그늘? 그 그늘의 실체? 혹은 프로파간다의 실체와 사회(국가)로부터 받은 보이지 않는 상처들? 아니면, 억제되어 왔던 개인의 욕망?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갈등? 어느 쪽도 틀리지 않다. 오석근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개인에서 출발하여 방사형으로 확장되는 섬세한 내러티브다. 촘촘한 그물망으로 짜여져 해체할 수 없는 상호관계에 주목하는 것, 그것이 그가 다루는 화법의 주요 지점이기 때문에 다면적이고 복합적일 수 있는 것이다.


오석근은 80,90년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주변인들로부터 어린시절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사례들과 그 이유에 대해 조사하고 수집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생에게 칼을 들었던 무시무시한 기억, 비오는 날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던 기억이나 성추행 당한 기억, 주로 음울하고 충격적인 이 기억의 편린들을 재구성한 것이 바로 잔혹
교과서(Text book)다. 오석근은 그렇게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의 장소-인천과 부천 등의 연안부두를 중심으로-과거를 해체하고 복구한다. 그의 유년인 동시에 한국의 유년, 나아가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과거(동시에 현재)들을.

 
현) Lab DotlineTV 디렉터 / 독립큐레이터, 문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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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칼럼2013. 3. 8. 04:57

Michell Mazzoni
건조한 시선과 역설적 배치를 통한 격정의 화면

 

 

 

사진과 비디오 작업을 해온 프랑스 작가 미쉘은 정지된 사진의 속성을 영상에 구현, 미세한 동작이나 갑작스런 움직임을 이용함으로써, 응시하고 있던 관객에게 감정적 동요와 충격을 유도한다. 정적이고 평면적인 프레임에 강한 사진 작업과 동적이고 입체적인 구조를 요구하는 영상 작업 사이의 긴장감은, 두 매체의 간극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최소화하는데, 이러한 역설적인 감각은 미쉘 특유의 건조한 영상 작법으로 구현된다. 정적인 영상을 통해, 사진으로 회귀하려는 태도나, 관람자가 안심한 틈을 타 영상매체의 속성을 극대화 해버리는 방식들은 견고했던 경계를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비디오 작품 <2mn 59 with sarah>에서 증명사진 같은 사라를 방심한 채 보고 있다가는, 한 순간 가슴을 쓸어 내려야 할 것이다. 정면을 응시하던 사진 속 사라의 눈동자가 재빨리 옆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제서야 우리는 영상을 보고 있던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특정 매체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굉장한 무게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이처럼, 원본이나 팩트에 대한 조건 없는 수용이 전제 될 때, 가장 순수한 이해를 하게 된다. 선험적 지식이 없어야 완벽한 수용이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미쉘이 추구하는 ‘팩트’ 이자, ‘재현’이다.


미쉘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팩트’ 그 자체이거나 연출되지 않은 ‘재현’이기 때문에, ‘건조한’ 태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 리얼리티와 원본에 대한 의구심을 부축이고, 이질감을 조성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와 ‘시선’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애용되었던 ‘낯설게 하기’에 닿아있는 것이나, 뒤샹의 변기처럼 원본의 ‘의미 탈락’을 유도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다룰 수 있는 것도, 대상과 비대상, 현실과 초현실 사이에 균열을 만들고, ‘개념’에 관한 무의미를 역설하는 층위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소리를 모으는 작업 또한 다르지 않다. ‘바람소리’, ‘도시의 소음’, ‘등대가 보이는 바다’ 등대상의 일부분을 촬영한 정적인 영상에서도 같은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파도 소리가 미약한 바다는 그 자체로, 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는 또 그 나름대로, 사실(현장) 그 자체를 담아서 보여준다. 정적인 이미지 속에 역동적으로 재현되는 바람 소리는, 시각을 압도하고 이미지에 대한 가치를 하락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역설적이고, 무미한 미쉘의 ‘랜드스케이프’는 지루한 시점을 과감하게 펼쳐놓고, 느긋하게 관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현) Lab DotlineTV 디렉터 / 독립큐레이터, 문예진

(주)샘표식품(샘표스페이스) 큐레이터 / DotlineTV기획,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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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칼럼2013. 3. 8. 04:53
 

영화의 재현 그너머의 리얼리티
'리얼리티 너머의 가상현실'
신창용
 


신창용은 영화의 특정 장면에 대한 회화적 재현에 관심을 가진 작가다. 종종 ‘이소룡 작가’라는 별칭이 따르기도하지만, ‘이소룡’은 그의 창작어법에 있는 여러 개의 어휘 중 하나로 해석해야 옳다. 화면 속에 구축된 다이나믹한 골조는 명쾌한 회화적 재현에 닿아 있고, 포착된 영화의 2차원적 단면들 속엔 현실을 넘어선 가상과, 가상을 재현한 현실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다. 동시에 미래주의 작가들이 화면에 담아내려고 했던 속도의 미를 구사하여 정지된 화면을 극복하거나, 입체적 시각으로 영화적 작법을 포착, 변용하기도 한다. 이런 내러티브에 대한 꾸준한 탐구와 문학적 화법으로 인해, 화면밖으로 불거져나온 곁가지가 다면적인 스토리를 암시하게 된다.

 

영화 '소라닌'의 재현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다른 2차원의 평면-무수한 영화 스틸컷과 포스터-와 차별화시킬 수 있는 요소와, 방법론에서의 당위가 있느냐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의외로 심플하다. ‘리얼리티 재현’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의 세계와 물감을 칠하고 바르는 ‘회화적 노동’이 만나는 환영의 영역. 이것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예술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이고, 차별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창용의 회화는 하이퍼리얼리즘이나 성실한 묘사와는 거리가 있다. 일부 ‘이소룡’외에는 대부분의 인물들-주인공,엑스트라-의 얼굴이나 옷매무새를 대충 얼버무려 놓았다. 그건, ‘영화 간판’을 페인팅으로 재현하던 아날로그 시대와 현실의 모든 순간이 JPG파일로 대체될 수 있는 디지털시대를 다른 패러다임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와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소위 ‘영화 간판쟁이’로 불리워지던 간판 페인터들은 어떻게 하면, 영화와 ‘똑같이’ 그릴까에 몰두했다면, 모든 영상을 캡쳐할 수 있는 2011년의 작가 신창용은, 특정 ‘감성’에 관한 극대치의 표현에 집중하고 있다. 이를테면, 남성성에 치우친 극단적인 힘의 양극화, 명확한 선악구조를 통한 ‘공포감의 증폭’을 들 수 있는데, 이런 구조적이고 디테일한 연출을 통해 정신적 영역을 끓어들임으로써 영화의 ‘회화적 재현’에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내게 된다. ‘리얼리티’가 결핍됨으로써 심적 영역이 더 많은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시각적 영역이 축소될 때, 다른 감각의 세계가 눈을 뜨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공포 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다른 2차원의 평면-무수한 영화 스틸컷과 포스터-와 차별화시킬 수 있는 요소와, 방법론에서의 당위가 있느냐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의외로 심플하다. ‘리얼리티 재현’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의 세계와 물감을 칠하고 바르는 ‘회화적 노동’이 만나는 환영의 영역. 이것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예술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이고, 차별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창용의 회화는 하이퍼리얼리즘이나 성실한 묘사와는 거리가 있다. 일부 ‘이소룡’외에는 대부분의 인물들-주인공,엑스트라-의 얼굴이나 옷매무새를 대충 얼버무려 놓았다. 그건, ‘영화 간판’을 페인팅으로 재현하던 아날로그 시대와 현실의 모든 순간이 JPG파일로 대체될 수 있는 디지털시대를 다른 패러다임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와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소위 ‘영화 간판쟁이’로 불리워지던 간판 페인터들은 어떻게 하면, 영화와 ‘똑같이’ 그릴까에 몰두했다면, 모든 영상을 캡쳐할 수 있는 2011년의 작가 신창용은, 특정 ‘감성’에 관한 극대치의 표현에 집중하고 있다. 이를테면, 남성성에 치우친 극단적인 힘의 양극화, 명확한 선악구조를 통한 ‘공포감의 증폭’을 들 수 있는데, 이런 구조적이고 디테일한 연출을 통해 정신적 영역을 끓어들임으로써 영화의 ‘회화적 재현’에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내게 된다. ‘리얼리티’가 결핍됨으로써 심적 영역이 더 많은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시각적 영역이 축소될 때, 다른 감각의 세계가 눈을 뜨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공포 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의 재현으로 1차적 진입을 시도하지만, 결국, 내러티브를 굽이치는 심정 영역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흔적을 포착하고 가시화하는 일, 신창용이 도달하고자하는 곳은 ‘재현’의 층위이지만, 결국, ‘재현’ 그 너머의 것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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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칼럼2013. 3. 8. 04:50

회화와 에니메이션의 경계에서, 수경 


현대 동양화의 영역탐구와 진화는 회화의 ‘경계 파괴’나 ‘매체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사례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손동현이나 육심원 등의 작가들에게서 보여졌던 공통점, 즉 전통적 매재와 현대적 소재의 융합을 통한 대중주의 노선이라는 교집합, 시선을 붙들어 즉발적 피드백을 유도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장지-화선지의 일종-에 채색을 하는 것이, 일러스트의 신항로로 혹은 팝아트의 대중이미지 차용을 통한 식상함을 달래줄 방편으로 구사되어 왔던 것이다.

 


이후 동양화의 재료(장지,먹,수간채색)를 통한 현대적 이미지 생산은 더욱 가속화 되었지만 별다른 돌파구는 없어보였고, 대중적 이미지 차용이라는 다소 편협하고 식상한 컨셉이 난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 시류의 한 가운데에, 다소 의외의 선택을 통해 창작영역의 새로운 층위를 확보한 작가가 있다. 수경은 이러한 틈새를 공략한 대표적인 작가다.

수경은 동양화의 ‘채색 기법’ 즉, 장지에 ‘수간채색’을 쌓아 올리는 페인팅을 해왔다. 관계를 통해 얻은 상처나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한 트라우마,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흔적’에 대해 다양한 내러티브를 설치하여 자전적 파노라마를 구현해왔다. 특정한 상황으로부터 한 개인에게 주어진 심리적 강박이나 이것으로부터 출발한 모든 이야기 줄기는 곁가지를 내면서 방사형으로 드라마를 만들어 가게 되는데, 수경의 회화작품에서는 단편적인 한 장면만이 포착되어 있지만, 이 한 편을 받쳐주기 위해 수십 개의 스토리 페이지를 에스키스 해놓는다. 입체적이고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스토리 구조로 인해, 한 점의 회화작품에 밀도 있는 무게감과 개연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 전달의 한계 극복을 위한 새로운 방안이 필요했고, 이런 정지된 화면에 시간과 율동을 부여한 것이 바로 ‘동양화적 에니메이션’이었다.



동양화를 전공한 수경은 영화아카데미에서 다시 에니메이션 연출을 전공한 뒤 <로망은 없다>라는 장편으로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 이후 SICAF 등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수경의 이전 실험 에니메이션은 앞서 언급한 한국화의 장르 확장에 있어서 새로운 층위를 제시해 주었다. 즉, 한국화(수간채색으로 올린 회화 혹은 먹선을 이용한 인물표현)를 근간으로 하여 확장된 개념이었다. 페인팅에 서사구조와 모션을 추가함으로써 정적인 회화가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에니 속 색채는 컬러풀하고 아기자기하지만, 담겨진 내용은 그로테스크 쪽에 가깝다. 이런 극단적 배치는 기괴스럽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제3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우울하고 묘한 정서적 충격을 가져다 준다. 전통 회화의 방법을 고수하면서 한 컷, 한 컷이 완결된 하나의 작품인 동시에, 수백 , 수천 개의 작품이 한편의 에니메이션이 될 수 있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다. 오랫동안 구축해온 창작의 바운더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그것으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 있는 것, 그것이 수경이 개척하고 일군 그녀의 세계다.



매일 같은 집으로 돌아가지만, 또 매일 이름 모를 거리 위의 우리를 상상한다. 항상 이곳에 있지만 항상 이곳에 없는 우리는, 수경의 세계가 부럽다.


 

Lab DotlineTV 디렉터 / 독립큐레이터, 문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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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칼럼2013. 3. 8. 04:48

이미지와 언어의 재구성, 위영일

 ‘욕망’이란 창작의 덫이라 상정해도 좋을 만큼 예술가들에겐 인기 품목이다. 바꾸어 말하면 타성에 빠지기엔 최적의 요건을 갖추었다는 말도 된다. 독특한 소재나 배경을 설정한 드라마는 아무래도 평가에서 일종의 어드벤티지가 있지만, 통속극을 다루어야한다면 그 접근방식과 연출, 서사구조의 점수는 낱낱이 들통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위영일이 택한 ‘욕망’은 통속극을 택한 연출가의 무모함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잘해도 본전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위영일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그가 드러내고 싶었던 주제의식에서 보다는, 그가 짜놓은 얼개 속의 ‘재치’나 ‘구성’의 파괴력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이를테면, 보편적 시각세계를 뒤엎거나, 예술품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파생하는 에너지같은 것이다. 창의력과는 분명 다른 층위의 것이다.


위영일은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재편된’이미지로 표상화하고, 현실과 가상 그 어느 편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 그가 상정한 ‘식욕, 성욕, 장수욕, 권력, 편리성, 속도, 기네스욕’이라는 이 7가지 욕망은, 역시 임의적인 가상 행성 안에 존재한다는 플롯(Plot)으로 그것을 상술하고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 행성은 '위영일이’라고 부를 때의 발음을 옮긴 ‘Planet wee012 All-Star’이다. 인간의 욕심과 허영이 천착하는 비가시적인 지대, 그 안에 비물질적인 욕망이 물리적 실체로 구상화되어가는 형식이다. 달리 표현하면, 현실에서 폭주하는 비정상적인 욕구들의 실체를 시각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과 같다. 이상형(Ideal type)의 모범 답안으로 제시해놓은 것들, 즉, ‘짬뽕맨, 짬뽕룡, 만족걸’은 작가의 양식으로 케릭터를 재현한 뒤, ‘이상형(혹은 이상향)’ 그 자체를 역설하고 풍자하는, 그리하여 자신이 위치한 지역과 그 시스템에서 생산되는 문화적 산물(인터넷, TV, 잡지, 스포츠 등)들을 재조합하게 된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를 주지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도구까지 환기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먹기만 하면 모든 것이 근육이 되고마는 희귀병에 걸린 근육질 사나이 ‘심커스’는 인간의 과도한 식욕의 상징이 되고, 몸의 앞뒤에 가슴이 달린 채 얼굴과 음핵이 두 개나 있는 ‘만족걸’은 절제없는 성욕으로 은유된다. 베트맨의 얼굴과 슈퍼맨의 몸, 그리고 우람한 상체에 부실한 다리로 구성된 ‘짬뽕맨’은, 미인들의 얼굴에서 가장 완벽한 눈코입을 가져다 조합하지만, 기이하고 부자연스런 얼굴이 되는 것을 목격한 때의 찝찝한 기분과 비슷할 것이다.


위영일은 그간, 예술가들의 창작의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후기자본주의 미술시장의 부조리한 시스템을 꼬집기도 했으며, 작품에 쓰여지는 도구들에 관한 도큐멘트를 구성하기도 했다. 2007년 노암갤러리에서의 개인전 ‘그들만의 리그’사후에 정리된 ART판(즉 예술판) 도표는, 위트있는 독설로 일갈해버리는 그의 언어미학을 단적으로 표출해준 좋은 사례다.

위영일이 선택하는 것은 조형요소이기도 하지만, 언어 그 자체이기도해서, 언어와 조형의 상호 개입과정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신성시되고 불가해한 미술의 영역으로 대중이 적극 개입할 수 있게 만드는 지렛대로 작용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현대미술판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무한한 상상력을 미끼로 두루뭉술한 조형언어로 무마하려는, 비겁한 창작자는 적어도 아니라는 얘기니까 말이다.


 
Lab DotlineTV 디렉터 / 독립큐레이터, 문예진
(주)샘표식품의 공장미술관인 샘표스페이스 큐레이터 재직 / DotlineTV기획,제작
2009ATU,2010ATU 기획 및 감독(KT&G상상마당,아트하우스모모) / 굿모닝신한증권갤러리 개관전
외 다수의 큐레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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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칼럼2013. 3. 8. 04:46

구토하는 올랭피아의 美, 고등어

 

작가 ‘고등어’의 그림 속 이미지들은 해체, 분리된 여성의 신체들을 빽빽하게 배치시킴으로써 관람자의 시각에 일정한 데미지를 준다. 비천함(Abjection)을 함축한 이미지들이 화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것은 ‘마이클 홀퀴스트(Michael Holquist)'의 표현대로 “그로테스크를 통해 제시되어 왔던 자유와 용기에 관한 담론”을 환기하기 위함일 것이다. 사회구조나 문화구조를 통해 강제,억압되어 왔던 ‘여성성’에 대한 반론에서부터 출발하는 고등어의 작품은, 이 모든 극단적 이미지들을 통해 통념을 강렬하게 비웃고 그 모서리로부터 얻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탐구들로 빼곡하다. 주체로서의 ‘보는 것’이 아닌 ‘보여지는 것’에 시달려온 여성의 강박을 표층으로 드러냄으로 얻는 치유, 다시 말해 그로테스크 담론의 ‘파괴를 통한 생성’의 논리를 적절히 응용한 경우다.

 

 

 

 

 

원래 그로테스크는 동굴의 의미를 갖는 ‘그로테(grotte)’라는 이탈리아어로 부터 유래한다. 이는 '동굴처럼(grotto-esque)' 깊고 어두운 지형적 특성을 여성 신체의 메타포로 규정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루소(Russo)의 식대로, “낮고/ 숨겨지고/ 땅에 관계되며/ 물질적이고/ 내재적이며/ 내장 같은” 동굴의 이미지가 여성의 신체,해부학 특성으로 표현되고, “지상적이고/ 물직적이고/ 고풍적인” 그로테스크가 대지의 여신, 메두사와 같은 고대 여성 이미지와 결부되면서 ‘그로테스크 바디’로 등장하게 된다. 그로테스크 담론은 정상과 표준의 척도를 이야기하는 것, 즉 신체적 기형 그 이상의 반항과 위반을 상징하는 것을 제시한다. 결국 이런 그로테스크 바디는 정치, 사회적 신체로 상징, 치환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등어의 그림 속 신체들이 초현실적으로 절단되고 변형된 것은 이러한 맥락과 태도로 해석되어야 한다.

 

 

‘구토하는 올랭피아’에서, 그로테스크 회화/사진에서 자주 애용되는, 삼키고 토하는 ‘구강적 사디즘(oral sadism)’을 통해 ‘파괴와 재생’의 논리를 피력하는데, 고대 신화에서 차용된 듯한 작법, 이를테면 다리 벌린 여성의 성기 안으로 군중이 쓸려들어가는 것이나, 동물의 젖을 먹는 아이들의 모습들이, 모두 ‘파괴와 재생’의 연장선에 위치하는 것들이다. 반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강요했던 언어와 시각들에 관한 폭력성을 푸른 옷의 남성들을 통해 은밀하게 드러내고 포장하기에 이르지만, 동시에 그런 남성성과 여성성의 분리에 관한 무용함을 피력하는 쪽이 작가의 태도다. 곧, ‘젠더Gender’ 이전에 인간의 사회학적 보편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이다. 작품 속에 여성들은 규범으로부터의 이탈로 상징되고, 신체 범주로 보자면 비정상적이고 변이적이다. 이런 변형된 ‘그로테스크 바디’는 여성성을 남성에 대한 다름으로 규정, 무차별적으로 성별을 강조하는 초기 페미니즘의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했던 장치들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 드러난 부계질서에 대한 위반적인 상징법들은 ‘라깡(Jacquesle Lacan)’의 이론에 의하면 어머니와의 ‘외상적(traumatic)'분리를 통한 상실감을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그로테스크가 여성의 출현만을 인정하거나 남성 신체나 주체를 완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남녀 모두 인간이란 카테고리 안에서 위험과 비천함에 동시에 관계하고, 형성하는 것. 여성간의 차이, 여성 내부의 이질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남성적 그로테스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 모든 양성화의 속성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푸른 옷으로 표현된 남성들의 군상이 오히려 우울하고 어리석고 불완전해 보이는 것도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일 수 있는 모호한 중의성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3개나 달린 유방, 절단되고 남은 한쪽 다리에 신은 붉은 스타킹, 성욕을 감추지 않고 자유롭게 유희하는 해괴한-보편적 시각에서- 모습, 수유와 출산의 여과 없는 표현들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의 보편성에 가까운 존재들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작가가 지속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층위에 포진해 있다고 보면 된다.

 

 

거식증의 경험이 있는 작가는, 보여주기 위한 규격화된 기준으로 인해 고유한 자신의 언어를 훼손하고 주체를 파괴해버리는 역사의 악순환을 개인의 일로만 덮어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랜 사회구조 안에서 빚어진 문제였을 것이고, 오랜 통념이 만들어 놓은 굳어진 사고의 편협성 때문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타인(혹은 남성)의 눈에 즐거울 옷을 사고, 타인의 눈에 멋있을 몸매를 만들면서 정작 소멸되어갔던 자신을 되찾고 확립하는 일은 터부시했던, 나약한 우리의 오류들을 환기하고 바로잡는 일. 작품 속 여자인형들과 찢겨진 여성의 신체들을 통해 우리는 허상이 아닌 실체를 마주하게된다. 이 모든 트라우마와 치유의 과정이 결국 우리 모두에게 긍정적 반동을 이끌어내고 동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로테스크하고 아픈 신체들의 해체를 통해 오히려 더욱 굳건해지는 점에서 말이다.

 

미술작품들에서 빈번하게 짚고 가는 부분은 바로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치유되는 원리’이다. 작가가 강제된 ‘성적(Gender) 트라우마’를 해괴하고 파괴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고백한 것은 앞서 언급되었던, ‘자유와 용기에 관한 담론’을 이끌어내고자 함이다. 고백함과 동시에 용기를 얻고 다시 치유로 이어지는 것, 그것은 결국 규제되어온 여성성 남성성 모두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논리로 귀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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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칼럼2013. 3. 8. 04:41

기념비를 통한 폭력의 프레임, 이재훈

 

일반적으로 ‘기념비’는 삶의 지속성을 짧은 단면으로 잘라내거나 죽음의 스토리를 박제하려는 시도와 비스듬히 닿아있다. 그래서 ‘기념비’의 표상은 단편소설집의 ‘표제작’과 같을 것이고 무덤과도 친하다. 작가 이재훈은 이런 ‘기념비’의 도상을 회화의 내러티브로 편성하는 것에 전력을 다한다. 이를테면 고대 로마나 르네상스 시대의 부조 작품들에서 보여졌던 ‘기념비’의 외양이 평면의 회화로 변이,확장되는 것인데, 화면의 구성을 보면 로뎅의 브론즈 작품 ‘지옥의 문’을 떠올릴 정도로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비주얼을 갖추고 있다. 또 외면을 구성하는 서구식 데코레이션이나 회화의 물성을 극대화하는 프레스코 기법 또한 의도했던 시각적 불편함과 정서적 데미지를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내면을 구성하는 그의 태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필요를 느끼게 만든다. 기독교의 종교적 오만이나 강제적 선교를 빗대었던 “한손엔 성경 한손엔 칼”과 같은 류의 비판적 멍석을 깔아놓고, 다면적인 서사구조를 표면화시키는 이재훈의 연출법은, 그래서 문학적이다.


거대조직으로서의 사회와 그 집단으로부터 오는 폭력의 위험, 전체를 위해 요구받는 희생의 합리화, 그럼으로 인해 노출된 나약한 개인, 그런 사회와의 피치 못할 권력관계,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생물학적 객체들의 비애와 고통, 이 다면적인 목소리를 ‘기념비’라는 프레임을 통해, 혹은 프레스코라는 매체를 통해 압축하고 있는 것이다.



곪아서 덕지덕지 떨어져 나간 신체의 부위들은 기념비의 매끈한 아치로 마감되면서, 기념비 자체가 되기도,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로 은유되기도 한다. 전체 기념비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기형적인 객체로 인식되는 메카니즘으로 작동하는 것, 이 지점으로부터 비로서 작가의 목적은 쿨하게 드러난다. 동시에, 그 안에 품은 이야기들은 처절함을 통한 시적인 은유를 제공하는 것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현실과 자기 정체를 더 진하게 앓을 수 있게 된다.



<NOBLE SAVAGE>연작의 각 부제들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이러고들 있습니까”, “무엇을 바라겠습니까,”처럼, 의뭉스러우면서도 분명한 작가의 태도를 담고 있다. 현실 환기적 질문은 직접적인 비난보다 훨씬 또렷한 의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점잖은 선비적 비판이 꽤나 효과적으로 비춰지는 점도 <NOBLE SAVAGE>연작의 독창성에 힘을 보태고 있는데, 그건 동양화를 전공하면서, 먹을 활용하고, 석회를 변용하면서 터득한 이재훈식 ‘프레스코’의 회화적 발현으로 집약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이 컬러풀한 최근 회화 흐름의 대척점 위를 디디고 선 이유 또한 기법에 대한 치밀한 탐구의 연장선에 있는 걸로 보인다. 초기작들에서 보여주었던 동양화의 채색기법을 통한 컬러의 활용도를 떠올려본다면, 많은 연구와 선회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 드러내고자 했던 세계성이나 시대적 인식 또한 범용성을 수반한 섬세한 줄거리를 통해 흡입력을 극대화 하고 있다. 이를테면 진보한 사회라는 가면을 쓴채, 가장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 것인데, ‘익명성과 비루한 자아’를 통해 펼쳤던 시기(2006년)에서 시작해, ‘야만적 귀족성’을 통한 메시지 수혈방식으로 진화,확장 된 것으로 정리 할 수 있다. 시각화 구현 방식에 있어서는 스스로의 영역을 확보하면서도 견고한 기초 부지를 결코 도외시하지 않는다.



 
이재훈은 중앙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금호미술관 등, 다수의 개인전을 통해 회화의 물성에 관한 집요한 탐구와 예리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해왔다. 국립창작스튜디오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고양스튜디오’에 입주한 이재훈은, 1981년『청년 작가』전으로 시작된 국립현대미술관 『2008 젊은 모색展』에도 선정,전시 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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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칼럼2013. 3. 8. 04:41

징그러운 동어반복으로 짜여진 불편한 풍경
오수연
 

매체를 활용하는 수사법에서 복제 혹은 동어반복은 비교적 설득에 순조로운 편이다. 21세기 키워드인 나노와 복제 그리고 네가티브로 역할하는 편집증적 도상은 현대 파인아트의 정형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초소형 인형 제작을 수면화시켰던 함진, 이동욱, 최수앙은 이런 시류에 수혜자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라는 생각이 든다. 나노(nano) 이데올로기가 창작의 언어에 끼친 축소 지향적 풍토는 소형화되는 IT, 그 시대적 추세와 결부되어있다는 점에서 유연성 있는 반영이다. 또한 공간을 압도하지 못하는 결점을 보완키 위한 편집증적인 복제와 반복법 또한 충분히 운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파인아트의 현대적 흐름과 배경의 맥락으로 진단할 때, 오수연의 작업은 상투성 짙은 조각 작업이다. 하지만, 흙을 사용하여 구운 소형 인간의 형상은 단조롭고 지루한 외관을 가진데다가, 동시에 징그럽게 밀집되어있는 군상들은 하나의 인물상을 떠올리기보단 차라리 풍경이 되고 있다. 그것이 나노열풍을 이끌었던 기존의 작가군과 차별화되고 심지어 확장된 언어 발굴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풍경을 만든 것은 철저히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의 시점에서든 가능할 지점,이 아니라 커다란 세상의 풍경 안에서 그저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을 인물입자로 몰입시킨다. 한편, 작가의 이런 ‘관조적 태도’는 획일적,반복적 언어의 유형안에서 작가의 보호막 같은 것으로 작용하는데, 큰 시스템의 규율에 대항하기엔 미미한 존재로서의 자각과도 같아 보인다. 쓸쓸한 귀결이지만 냉엄하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무미건조한 인간 무리는, 개인이나 생명이기보단 풍경의 한 조각, 혹은 현상의 일부분이라는 관념에서 파생되는 것이 오수연 작업의 큰 골격이다. 그래서 작고 징그럽고 덩어리로 보이는 이 불편한 풍경은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는데서 매우 아이러니하다. 생략과 반복, 추상적 접근법을 택했던 것이 오히려 그 반대의 리얼리티를 야기했다는 지점에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오수연이 세상을 풀어내는 방식이다.


 
오수연은 이화여자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2003년 관훈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이후 2009년까지 세 번의 개인전을 치루었고 , ‘숨.쉬다 프로젝트’를 통해 개인 작업에서 그려낼 수 없었던 스케일의 공동 작업들을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다. 공공성이 강한 이 프로젝트들은 영속성이 없는 대신, 개인 작업에서 섭취하고 소화하지 못했던 영양분을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게 한다고 그녀는 얘기한다. 그 이야기를 듣던 나는, 그녀의 반복작업들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만만치가 않나보다,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녀의 작품과는 매치되지않는 호방한 성격과 커다란 웃음소리에 나는 그만 식겁을 했더랬다. 유쾌하지만 왠지 스릴러영화가 떠오르는건 왜일까. 게다가 ‘현실성 없는 남편’이었기에 자신을 선택해준 것 같다,라는 신혼중인 그녀 말이 1년 동안 내 귓전을 맴돌았었다. 오수연은 유머든 작품이든 임팩트를 아는 여자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역사적 멘트였다. 왠지 뒤 돌아서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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