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칼럼

회화와 에니메이션의 경계에서(수경)

curatinglab 2013. 3. 8. 04:50

회화와 에니메이션의 경계에서, 수경 


현대 동양화의 영역탐구와 진화는 회화의 ‘경계 파괴’나 ‘매체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사례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손동현이나 육심원 등의 작가들에게서 보여졌던 공통점, 즉 전통적 매재와 현대적 소재의 융합을 통한 대중주의 노선이라는 교집합, 시선을 붙들어 즉발적 피드백을 유도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장지-화선지의 일종-에 채색을 하는 것이, 일러스트의 신항로로 혹은 팝아트의 대중이미지 차용을 통한 식상함을 달래줄 방편으로 구사되어 왔던 것이다.

 


이후 동양화의 재료(장지,먹,수간채색)를 통한 현대적 이미지 생산은 더욱 가속화 되었지만 별다른 돌파구는 없어보였고, 대중적 이미지 차용이라는 다소 편협하고 식상한 컨셉이 난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 시류의 한 가운데에, 다소 의외의 선택을 통해 창작영역의 새로운 층위를 확보한 작가가 있다. 수경은 이러한 틈새를 공략한 대표적인 작가다.

수경은 동양화의 ‘채색 기법’ 즉, 장지에 ‘수간채색’을 쌓아 올리는 페인팅을 해왔다. 관계를 통해 얻은 상처나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한 트라우마,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흔적’에 대해 다양한 내러티브를 설치하여 자전적 파노라마를 구현해왔다. 특정한 상황으로부터 한 개인에게 주어진 심리적 강박이나 이것으로부터 출발한 모든 이야기 줄기는 곁가지를 내면서 방사형으로 드라마를 만들어 가게 되는데, 수경의 회화작품에서는 단편적인 한 장면만이 포착되어 있지만, 이 한 편을 받쳐주기 위해 수십 개의 스토리 페이지를 에스키스 해놓는다. 입체적이고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스토리 구조로 인해, 한 점의 회화작품에 밀도 있는 무게감과 개연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 전달의 한계 극복을 위한 새로운 방안이 필요했고, 이런 정지된 화면에 시간과 율동을 부여한 것이 바로 ‘동양화적 에니메이션’이었다.



동양화를 전공한 수경은 영화아카데미에서 다시 에니메이션 연출을 전공한 뒤 <로망은 없다>라는 장편으로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 이후 SICAF 등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수경의 이전 실험 에니메이션은 앞서 언급한 한국화의 장르 확장에 있어서 새로운 층위를 제시해 주었다. 즉, 한국화(수간채색으로 올린 회화 혹은 먹선을 이용한 인물표현)를 근간으로 하여 확장된 개념이었다. 페인팅에 서사구조와 모션을 추가함으로써 정적인 회화가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에니 속 색채는 컬러풀하고 아기자기하지만, 담겨진 내용은 그로테스크 쪽에 가깝다. 이런 극단적 배치는 기괴스럽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제3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우울하고 묘한 정서적 충격을 가져다 준다. 전통 회화의 방법을 고수하면서 한 컷, 한 컷이 완결된 하나의 작품인 동시에, 수백 , 수천 개의 작품이 한편의 에니메이션이 될 수 있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다. 오랫동안 구축해온 창작의 바운더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그것으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 있는 것, 그것이 수경이 개척하고 일군 그녀의 세계다.



매일 같은 집으로 돌아가지만, 또 매일 이름 모를 거리 위의 우리를 상상한다. 항상 이곳에 있지만 항상 이곳에 없는 우리는, 수경의 세계가 부럽다.


 

Lab DotlineTV 디렉터 / 독립큐레이터, 문예진
(주)샘표식품의 공장미술관인 샘표스페이스 큐레이터 재직 / DotlineTV기획,제작
2009ATU,2010ATU 기획 및 감독(KT&G상상마당,아트하우스모모) / 굿모닝신한증권갤러리 개관전
외 다수의 큐레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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