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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를 통한 치유와 해체를 통한 복구(오석근)

폭로를 통한 치유와 해체를 통한 복구, 오석근 트라우마(Trauma)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고, 심리학, 정신병리학과 같은 영역들의 탐구가 공격적으로 가시화되는 것은 그만큼 공동체 속의 ‘객체’가 화두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살자의 급증 현상이나 기괴한 비현실성과 절망, 도착증세의 만연, 싸이코패스의 급증, 이런 이상 징후들은 개인과 맞물린 사회적 치유와 긴밀하게 엮인 문제이기에, 안팎과 이기(理氣) 등의 전방위적인 접근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오석근의 사진작업은 ‘고백’인 동시에 ‘폭로’이고, ‘상처’인 동시에 ‘치유’이다. 유년시절의 충격적 기억을 복구하여 현재의 공간에 대치시킨다는 점에서 고백이지만, 각종 드라마틱한 장치를 설치하는 이미지 기술법들, 이를테면 초등학교 교과서 안에 살던 ‘..

미술칼럼 2013.03.08

건조한 시선과 역설적 배치를 통한 격정의 화면(Michell Mazzoni)

Michell Mazzoni 건조한 시선과 역설적 배치를 통한 격정의 화면 사진과 비디오 작업을 해온 프랑스 작가 미쉘은 정지된 사진의 속성을 영상에 구현, 미세한 동작이나 갑작스런 움직임을 이용함으로써, 응시하고 있던 관객에게 감정적 동요와 충격을 유도한다. 정적이고 평면적인 프레임에 강한 사진 작업과 동적이고 입체적인 구조를 요구하는 영상 작업 사이의 긴장감은, 두 매체의 간극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최소화하는데, 이러한 역설적인 감각은 미쉘 특유의 건조한 영상 작법으로 구현된다. 정적인 영상을 통해, 사진으로 회귀하려는 태도나, 관람자가 안심한 틈을 타 영상매체의 속성을 극대화 해버리는 방식들은 견고했던 경계를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비디오 작품 에서 증명사진 같은 사라를 방심..

미술칼럼 2013.03.08

영화의 재현 그너머의 리얼리티(신창용)

영화의 재현 그너머의 리얼리티 '리얼리티 너머의 가상현실' 신창용 신창용은 영화의 특정 장면에 대한 회화적 재현에 관심을 가진 작가다. 종종 ‘이소룡 작가’라는 별칭이 따르기도하지만, ‘이소룡’은 그의 창작어법에 있는 여러 개의 어휘 중 하나로 해석해야 옳다. 화면 속에 구축된 다이나믹한 골조는 명쾌한 회화적 재현에 닿아 있고, 포착된 영화의 2차원적 단면들 속엔 현실을 넘어선 가상과, 가상을 재현한 현실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다. 동시에 미래주의 작가들이 화면에 담아내려고 했던 속도의 미를 구사하여 정지된 화면을 극복하거나, 입체적 시각으로 영화적 작법을 포착, 변용하기도 한다. 이런 내러티브에 대한 꾸준한 탐구와 문학적 화법으로 인해, 화면밖으로 불거져나온 곁가지가 다면적인 스토리를 암시하게 된다. ..

미술칼럼 2013.03.08

회화와 에니메이션의 경계에서(수경)

회화와 에니메이션의 경계에서, 수경 현대 동양화의 영역탐구와 진화는 회화의 ‘경계 파괴’나 ‘매체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사례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손동현이나 육심원 등의 작가들에게서 보여졌던 공통점, 즉 전통적 매재와 현대적 소재의 융합을 통한 대중주의 노선이라는 교집합, 시선을 붙들어 즉발적 피드백을 유도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장지-화선지의 일종-에 채색을 하는 것이, 일러스트의 신항로로 혹은 팝아트의 대중이미지 차용을 통한 식상함을 달래줄 방편으로 구사되어 왔던 것이다. 이후 동양화의 재료(장지,먹,수간채색)를 통한 현대적 이미지 생산은 더욱 가속화 되었지만 별다른 돌파구는 없어보였고, 대중적 이미지 차용이라는 다소 편협하고 식상한 컨셉이 난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 시류의 한 ..

미술칼럼 2013.03.08

이미지와 언어의 재구성(위영일)

이미지와 언어의 재구성, 위영일 ‘욕망’이란 창작의 덫이라 상정해도 좋을 만큼 예술가들에겐 인기 품목이다. 바꾸어 말하면 타성에 빠지기엔 최적의 요건을 갖추었다는 말도 된다. 독특한 소재나 배경을 설정한 드라마는 아무래도 평가에서 일종의 어드벤티지가 있지만, 통속극을 다루어야한다면 그 접근방식과 연출, 서사구조의 점수는 낱낱이 들통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위영일이 택한 ‘욕망’은 통속극을 택한 연출가의 무모함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잘해도 본전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위영일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그가 드러내고 싶었던 주제의식에서 보다는, 그가 짜놓은 얼개 속의 ‘재치’나 ‘구성’의 파괴력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이를테면, 보편적 시각세계를 뒤엎거나, 예술품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미술칼럼 2013.03.08

구토하는 올랭피아의 美(고등어)

구토하는 올랭피아의 美, 고등어 작가 ‘고등어’의 그림 속 이미지들은 해체, 분리된 여성의 신체들을 빽빽하게 배치시킴으로써 관람자의 시각에 일정한 데미지를 준다. 비천함(Abjection)을 함축한 이미지들이 화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것은 ‘마이클 홀퀴스트(Michael Holquist)'의 표현대로 “그로테스크를 통해 제시되어 왔던 자유와 용기에 관한 담론”을 환기하기 위함일 것이다. 사회구조나 문화구조를 통해 강제,억압되어 왔던 ‘여성성’에 대한 반론에서부터 출발하는 고등어의 작품은, 이 모든 극단적 이미지들을 통해 통념을 강렬하게 비웃고 그 모서리로부터 얻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탐구들로 빼곡하다. 주체로서의 ‘보는 것’이 아닌 ‘보여지는 것’에 시달려온 여성의 강박을 표층으로 드러냄으로 얻는 치유..

미술칼럼 2013.03.08

기념비를 통한 폭력의 프레임(이재훈)

기념비를 통한 폭력의 프레임, 이재훈 일반적으로 ‘기념비’는 삶의 지속성을 짧은 단면으로 잘라내거나 죽음의 스토리를 박제하려는 시도와 비스듬히 닿아있다. 그래서 ‘기념비’의 표상은 단편소설집의 ‘표제작’과 같을 것이고 무덤과도 친하다. 작가 이재훈은 이런 ‘기념비’의 도상을 회화의 내러티브로 편성하는 것에 전력을 다한다. 이를테면 고대 로마나 르네상스 시대의 부조 작품들에서 보여졌던 ‘기념비’의 외양이 평면의 회화로 변이,확장되는 것인데, 화면의 구성을 보면 로뎅의 브론즈 작품 ‘지옥의 문’을 떠올릴 정도로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비주얼을 갖추고 있다. 또 외면을 구성하는 서구식 데코레이션이나 회화의 물성을 극대화하는 프레스코 기법 또한 의도했던 시각적 불편함과 정서적 데미지를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내면을..

미술칼럼 2013.03.08

징그러운 동어반복으로 짜여진 불편한 풍경(오수연)

징그러운 동어반복으로 짜여진 불편한 풍경 오수연 매체를 활용하는 수사법에서 복제 혹은 동어반복은 비교적 설득에 순조로운 편이다. 21세기 키워드인 나노와 복제 그리고 네가티브로 역할하는 편집증적 도상은 현대 파인아트의 정형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초소형 인형 제작을 수면화시켰던 함진, 이동욱, 최수앙은 이런 시류에 수혜자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라는 생각이 든다. 나노(nano) 이데올로기가 창작의 언어에 끼친 축소 지향적 풍토는 소형화되는 IT, 그 시대적 추세와 결부되어있다는 점에서 유연성 있는 반영이다. 또한 공간을 압도하지 못하는 결점을 보완키 위한 편집증적인 복제와 반복법 또한 충분히 운명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파인아트의 현대적 흐름과 배경의 맥락으로 진단할 때, 오수연의 작업은 상투성 짙은 조..

미술칼럼 2013.03.08

차갑고 아픈 철판회화(조현익)

차갑고 아픈 철판회화, 조현익 일부, 철판에 그림 그리는 작가,라는 표현을 쓴다. 또 일부 클림트의 모방이 아니냐는 말도 한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굉장히 원시적인 접근이다. 구상이니까, 혹은 비구상이니까 동류의 예술이라고 우기는 것과 다를게 없다. 조현익의 철판회화는 차갑고 아프다. 더 냉정히 얘기하면 철판 속 여인은 무서우면서도 동시에 처연하다. 아름답진 않다는 말이다. 휘청이는 머리칼들이며, 부식된 금속의 기운이 춥고 외로운 정서를 형성해서이다. 2006년 개인전에서 절반 이상의 신작을 발표했던 그는, 다작과 속작의 대가였다. 그런 지점에서 그의 작품은 오히려 앤디워홀의 기계적 복제에 가깝지만, 팝아트의 대중성과는 천리길 떨어져있다. 출력한 여성의 사진을 철판에 대고 신나로 문지르는 방식은 팝아트..

미술칼럼 2013.03.08

계층과 사회 단면을 응축시키는 즐거운 손길, 정영진

계층과 사회 단면을 응축시키는 즐거운 손길 정영진 정영진은 ‘2006년 금호미술관 영아티스트’에 선정되어 화려한 개인전을 치룬바 있다.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았던 정영진의 작업은 작품의 행로에 궁금증이 생겼던 몇 안되는 작가 중 한명이었다. 당시, 중앙대학교 동양화과 출신들이 몰고 왔던 한국화의 새바람 물결에서 조차도, 그녀의 비판적 너스레는 내 구미를 끌어당기기에 넘치고도 남았다. 또한, 당시 유행했던(물론 지금도 진행중인) 팝아트화 된 한국화의 조류에 합류하지도 않았다. 권력과 욕망에 관해 이야기하고자했던 것이 다만 지필묵의 정서를 통해서였고, 그 응축의 대상이 대중미디어들의 찰나에서 야기된 현장이란 점, 그걸 두고 굳이 당시 조류와 묶어낸다면 좀 억울한 면이 있을 것이다. 계층과 사회적 권력의 단면을..

미술칼럼 2013.03.08